1986년, 나는 스무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병역 문제를 처리하고 부모님과 함께 이민 가방 몇 개에 모든 삶을 담아 도착한 곳은 텍사스 달라스.

그해 한국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느라 떠들썩했고, 2년 뒤엔 1988 서울 올림픽까지 예정돼 있어서 온 국민이 들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벅찬 분위기에서 멀리 떨어져, 달라스라는 낯선 도시에서 처음으로 내 미래를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달라스는 내가 상상하던 것 보다 훨씬 더 컸고, 더 넓었으며, 무엇보다 모든 게 너무 '편리'해 보였다. 아직 영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던 나는, 그냥 운전하면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문화 충격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라스 외곽지역인 Irving에 있는 월마트에 처음 가본 날은 내 기억 속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그 당시는 서울에서도 백화점이란 곳은 백화점 층층이 에스컬레이터 타고 오르며 비싼물건 '구경만 하는 곳'이었는데, 이 월마트는 창고처럼 생긴 넓은 매장에 주차장도 어마어마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텍사스의 땡볕 아래에서 줄기차게 흐르던 땀이 바로 사라졌다.

그때 월마트 매장 안에는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주방기기들이 잔뜩 진열돼 있었다. 대형 TV, 전축, 커피메이커, 세탁기, 건조기, 냉장고, 바베큐 그릴, 토스터... 한국에서는 드라마 속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던 그런 기기들이 저렴한 가격표를 달고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긴 그냥 평범한 사람들도 이렇게 좋은 물건 쓰는구나" 하고 마음 깊이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이 아직 다다르지 못한 어떤 미래를, 나는 그날 그 월마트에서 느꼈던 것이다.

지금이야 DFW 지역에 월마트가 다양한 장소에 약 70여 개 이상 영업하고 있다지만 그때는 3개 정도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90년대까지, 달라스 지역 한인 인구는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달라스 전역 한인 인구가 2-3만명 정도로 지금의 반에반도 채 안되었고, 주로 교회, 세탁소, 마켓 같은 소규모 사업을 중심으로 뭉쳐 살았다. 한인마트도 소규모 였다. 그래도 교회에서 함께 밥 먹고 찬양하고, 아이들 교육 걱정에 발전하는 한국 뉴스를 들으며 함께 웃고 떠들던 그 시간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건 그해 한국에서 열렸던 아시안게임과, 다가올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우리나라가 달라졌다", "세계무대에 나설 준비가 됐다"는 자부심이 퍼져 있었고, 교회에서도 아이들이 태극기를 그리며 자랑스러워했다. 어떤 이들은 달라스에서 올림픽 중계를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해서 돌려보기도 했고, 어떤 분은 "한국이 이제 선진국이 된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아직 젊었고, 앞날은 막막했지만, 그런 작고 큰 감동들 덕분에 나는 버틸 수 있었다. 한국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통해 세계 속에 존재감을 드러내던 시기, 나는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문명 속에서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법을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었다.

지금은 아틀란타에 살고 있다. 50이 넘은 나이에 이곳으로 이사 오며 또 다른 챕터를 열었고, 달라스에서 보냈던 30년 가까운 시간은 여전히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월마트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감탄했던 이방인,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자랑스럽다며 조용히 웃던 젊은 나는 지금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젠 미국 프리웨이에 흔하기만 한 현대,기아 자동차와 월마트에서 삼성,엘지 제품을 보면서 흐뭇해 하면서 60이 된 나이지만, 그 시절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1986년 달라스의 하늘 아래, 나는 단지 미국 땅을 밟은 게 아니라, 삶의 또 다른 가능성과 꿈을 마주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지금도 내 인생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