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서른네 살. 한국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미국에 유학 와서 시민권자와 결혼해 영주권을 받았다.
지금은 실리콘밸리 인근 산호세에서 IT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커리어도, 이민 신분도 안정적이지만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도대체 나는 미국 땅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어릴 적 내 기억 속 미국 이민은 세탁소, 리커스토어, 봉제공장, 델리 같은 이미지였다.
70-90년대 미국에 와서 정착한 이전 세대는 영어가 부족해도 ‘집을 사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삶’을 목표로 삼았다.
지금은 다르다.
IT, 헬스케어, 회계, 공학, 스타트업—이민자의 모습은 고도화됐고, 방식도 바뀌었다. 영어도 잘하고, 학위도 있고, 직장도 구했고, 연봉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미국 정착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낯설다.
왜일까?
첫째,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다.
나는 외형상 미국 사회에 통합된 듯 보인다. 영어로 회의하고, 미국인 상사와 일하고, 우버를 타고, 스타벅스에서 점심을 산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한국어로 생각한다. 김치 사러 H마트 가고, 유튜브는 ‘삼프로TV’ 본다. 한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중간자’로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에너지를 많이 쓴다.
둘째, 관계의 단절 때문이다.
미국은 철저히 개인 중심이다. 친구를 만들기도 어렵고, 만들어도 깊어지기 어렵다. 부모 세대는 교회나 교민 모임에서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지금 우리 세대는 회사, 헬스장, 집만 반복된다. 사회적 네트워크 없이 직장만으로 버티는 삶은 오래가질 않는다.
셋째, 삶의 목표가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집 사기, 자식 대학 보내기’ 같은 목표가 명확했다. 지금은 결혼도 늦고, 자녀도 계획이 없다. 돈을 벌고는 있지만, 무엇을 위해 버는지 잘 모르겠다. 연봉 협상은 잘하는데, 인생 설계는 아직이다.
그래서 요즘 내가 스스로에게 묻는 건 이런 거다.
미국에서 10년 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은퇴는 어디서, 어떻게 하고 싶은가? 내 삶의 안전망은 무엇인가? 내가 여기에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이 질문에 아직 완벽한 답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다.
미국에서의 정착은 '직장'이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를 짜는 것이다.
직장은 일시적이다. 이직할 수도 있고, 해고될 수도 있고, 회사가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구조—지역사회, 인간관계, 건강, 재정, 가족—이 제대로 짜여야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최근 몇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교민 단체나 한인 네트워크에 조금씩 다시 발을 들인다.
집을 살지, 렌트로 계속 살지를 고민하며 재정 설계를 시작했다.
주말에는 의식적으로 오프라인 취미를 만든다. 테니스나 하이킹 같은 것들.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또래 한인들과 자주 대화하려 한다.
내가 내린 결론은 -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회가 많지만, 그만큼 외롭고 구조화되지 않은 사회다. 스스로 인프라를 만들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챙겨주지 않는다.
지금 나는 산호세에서 ‘직장인’이 아니라, ‘이민자로서의 내 삶’을 짜고 있다. 개발자라는 타이틀 뒤에 숨지 않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내 인생의 구조를 천천히 설계해보려 한다.
그게 진짜 ‘정착’ 아닐까.
요즘은 '왜 살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