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 살아 보면 "이런 법도 있었어?" 싶은 게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Eminent Domain입니다.
한국말로 하면 정부의 토지 수용권 정도인데, 쉽게 말하면 공공사업을 위해 정부가 개인 소유의 집이나 땅을 강제로 사들일 수 있는 제도입니다.
미국 하면 개인 재산권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잖아요.
내가 돈 주고 산 집인데 정부가 필요하다고 하면 내놓아야 한다니, 얼핏 들으면 미국답지 않은 제도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아무 이유 없이 마음에 드는 땅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Eminent Domain은 미국 수정헌법 제5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도로를 넓히거나 철도를 만들고, 학교나 공공시설을 건설하는 것처럼 공공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냥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집주인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정부가 생각하는 집의 가격과 내가 생각하는 가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부 측 감정에서는 집값이 120만 달러라고 하는데, 집주인은 앞으로의 개발 가능성 등을 생각해서 150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20년 동안 살면서 정든 집이라면 집주인 입장에서는 단순히 돈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Eminent Domain 분쟁에서는 "절대로 집을 내놓을 수 없다"는 싸움보다 "정부가 제시한 보상금이 너무 낮다"는 문제를 놓고 다투는 경우가 중요합니다.
감정평가가 적절했는지, 토지의 가치가 제대로 반영됐는지 등을 따져보게 됩니다.
미국에서 Eminent Domain 이야기가 나올 때 항상 등장하는 유명한 사건이 바로 2005년 Kelo v. City of New London 사건입니다.
코네티컷주 뉴런던 시가 경제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개인 소유 부동산을 수용하려 했고, 집주인 수젯 켈로가 이에 반발하면서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특히 논란이 컸던 이유는 단순히 고속도로를 만들거나 학교를 짓는 사업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제약회사 부지 확보로 집을 팔라고 한겁니다.
그런데 결국 연방대법원은 지역 경제개발도 넓은 의미에서 공공 목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판결이 나오자 미국에서도 반발이 상당했습니다.
"도로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결국 다른 민간 개발을 위해 내 집을 가져가는 것이 어떻게 공공의 목적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여러 주에서 이런 방식의 토지 수용을 제한하는 법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이어졌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다 보면 이런 제도가 아주 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워낙 땅이 부족한 도시이고 교통시설, 도로, 공공주택과 각종 기반시설 사업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공무원이 찾아와서 "다음 주까지 집을 비우세요"라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통지와 감정평가, 협상 등 법적인 절차가 있습니다. 소유자는 정부가 제시한 가격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실제로 이런 통지서를 받았다면 정부에서 돈을 준다고 하니 그냥 사인부터 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처럼 부동산 가격이 높은 지역은 금액 차이가 조금만 생겨도 수십만 달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개인의 집과 재산을 중요하게 보호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회 전체를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는 개인의 땅을 강제로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내 집인데도 100%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
미국에서 집을 가지고 오래 살아도 Eminent Domain을 처음 알게 되면 조금 놀라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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