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일찍 밭에 나가 보면 밤새 비를 맞은 토란잎에 물방울이 동그랗게 맺혀 있습니다. 그 물방울은 잎에 스며들지 않고 그대로 굴러 떨어지지요. 요즘 주변 한인 부모들이 하는 걱정을 듣다 보면 그 장면이 자꾸 떠오릅니다.
아이가 집에서 한국어를 곧잘 하는데, 그걸 대학에 어떻게 보여주느냐는 걱정입니다. 몸에 밴 실력이 원서 위에서는 물방울처럼 흔적 없이 굴러가 버릴까 봐 그러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답이 간단했습니다. SAT 과목시험 중에 Korean with Listening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듣기 문제가 있어서 시험장에 CD 플레이어를 챙겨 가야 했던 시험입니다.
그런데 College Board는 2021년 1월 19일, 미국 내 SAT 과목시험을 즉시 폐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해외 응시자 대상 시험도 그해 여름까지 정리됐습니다. 마지막 해였던 2020년에는 과목시험이 20개였고, 그중 12개가 외국어였습니다.
그렇다면 AP 한국어로 대신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분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College Board에는 지금도 AP 한국어 과목이 없습니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AP가 있는데 한국어는 빠져 있으니, 솔직히 좀 서운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현실적인 길로 꼽히는 것이 Seal of Biliteracy, 즉 이중언어 인증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때 두 언어를 높은 수준으로 구사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입니다.
하와이 주 교육위원회는 2015년 6월 16일 이 제도를 정책으로 채택했습니다. 당시 하와이는 이 인증을 도입한 열 번째 주였습니다.
하와이 기준은 조금 특별합니다. 주 공용어인 영어와 하와이어 중 하나에, 다른 언어 하나 이상을 높은 수준으로 구사해야 합니다. 영어와 하와이어 두 공용어를 모두 잘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한때 학교에서 쓰지 못하게 했던 하와이어가 이제는 졸업 인증의 한 축이 되었으니까요. 땅이 오래 품고 있던 씨앗은 결국 다시 싹을 틔우는 모양입니다.
한국어 실력은 어떻게 증명할까요. 하와이 공립고 안내를 보면 몇 가지 시험이 인정됩니다.
첫째는 Avant STAMP 시험입니다.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영역마다 5점 이상을 받아야 합니다. STAMP 4S에는 한국어가 포함돼 있습니다.
둘째는 ACTFL의 말하기 인터뷰(OPI)와 쓰기 시험(WPT)입니다. 영역별로 Intermediate Mid 이상에 해당하는 등급이 필요합니다.
AP 언어 시험 3점 이상도 인정되지만, 앞서 말했듯 한국어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결국 한국어를 하는 아이라면 STAMP나 ACTFL 쪽을 알아보는 게 맞습니다.
영어 쪽 조건도 있습니다. 영어 과목 누적 GPA 3.0 이상이나 Smarter Balanced 시험 3등급 이상처럼, 정해진 기준 중 하나를 충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와이의 경우 공립이나 차터스쿨에 다니는 졸업반 학생이 대상입니다. 사립학교에 다닌다면 학교 상담 교사에게 다른 길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시길 권합니다.
주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점도 꼭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인정하는 시험도, 필요한 점수도, 신청 시기도 제각각입니다. 학교 시험 담당자에게 직접 확인하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시험만 길이 있는 건 아닙니다. 공통 원서(Common App)에는 언어를 적는 칸이 따로 있습니다. 첫 언어인지, 말하기와 읽기와 쓰기가 되는지, 집에서 쓰는 언어인지를 각각 체크하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정직함이 중요합니다. 말은 되는데 쓰기가 약하다면 쓰기 칸은 비워 두는 게 맞습니다. 부풀린 체크 하나보다 정확한 체크 세 개가 더 믿음을 줍니다.
그 위에 이야기를 얹으면 됩니다.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며 통역을 맡았다든지, 교회 한글학교에서 동생들을 가르쳤다든지 하는 경험 말입니다.
대학이 궁금해하는 건 점수 하나보다 그 언어로 무엇을 했느냐일 겁니다. 언어는 쓰임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농사를 지어 보면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잎이 무성하면 누구나 땅 밑의 뿌리를 짐작합니다. 한국어 실력도 그렇게 보여주면 됩니다.
제가 부모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10학년쯤 STAMP 같은 시험을 한 번 미리 쳐서 어느 영역이 약한지 확인해 두겠습니다.
그다음 약한 영역, 대개는 쓰기를 1년 정도 꾸준히 다지겠습니다. 졸업반에 다시 쳐서 인증을 받고, 원서에는 그 과정을 짧게 녹이겠습니다.
다만 인증이 합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마다 이 인증을 얼마나 무게 있게 보는지는 다르고, 공개된 기준도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손해 볼 일은 없다고 봅니다. 아이 스스로 자기 언어를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되니까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SAT 한국어 시험이 사라진 건 분명 아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문 하나가 닫혔다고 길이 끊긴 것은 아닙니다.
저녁 무렵 마우나케아 쪽 하늘이 붉게 물들 때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아이에게 물려주려는 것이 시험 점수인지, 아니면 할머니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말인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아이의 한국어가 원서 한 줄로 남기를 바라시나요, 아니면 평생 쓰는 말로 남기를 바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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