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인도 힌두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뻔한 종교 소개겠거니 싶었는데, 아니었다.
볼수록 묘하게 빠져들었다.
화려한 색채의 제의, 신을 향한 춤과 노래,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철학적인 구조가 예상보다 훨씬 깊고 복잡했다.
그 중에서 내 시선을 가장 멈추게 한 건…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힌두교에서는 예수도 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싶어서 순간 눈을 의심했다.
기독교의 상징, 서구 문명의 중심 인물이라 여겼던 예수가… 힌두교의 신이라니.

더 찾아보니, 놀랍게도 힌두교 안에는 외부 종교 인물조차 ‘신의 화신(Avatar)’으로 받아들이는 관용 구조가 있었다.
힌두교에서 ‘아바타’라는 개념은 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형태인데, 대표적인 아바타가 우리가 아는 크리슈나, 라마 같은 존재다.

그런데 힌두 철학자들 중 일부는 예수도 그런 신의 아바타로 본다고 했다.

이건 단순한 다문화적 리스펙트가 아니다.
그들 입장에서 예수는 하나의 ‘신성한 존재’이며, 그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은 힌두적인 이상(사랑, 희생, 구원)의 완성체로 해석되기도 한다.

나는 한국에서 자라며 종교에 대해선 비교적 열려 있었지만, 예수가 ‘힌두교 신’이라는 말은 익숙한 기독교적 사고나 동양적 인식으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이건 종교 간 통합이라기보다는 힌두교의 유연성과 포용성의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됐다.

힌두교는 정답을 하나로 고집하지 않는다.
그들의 우주는 하나의 실체(브라만, Brahman)에서 다양한 신들이 파생되는 구조다.
그래서 ‘신은 하나지만, 그 모습은 무한하다’는 철학이 있다.
이 철학 아래에서는 예수, 부처, 무함마드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브라만의 다양한 얼굴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깊은 성찰을 자극하는 관점이다.
우리가 생각하던 '절대 진리'라는 개념은 이곳에서는 하나의 ‘접근 방식’에 불과하다.
힌두교는 그것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도 진리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 힌두교인들이 예수를 ‘배척’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수많은 신 중 하나일 수 있고, 크리슈나나 라마처럼 존중받는 존재지만, 반드시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매우 흥미로웠다.

경쟁하지 않으면서, 받아들인다.

우리는 누가 옳은지를 두고 논쟁하지만, 힌두교는 그 질문 자체를 흐리며 공존의 논리를 펼친다.

생각해보면 이건 인도라는 땅의 특성과도 닮아 있다.
수천 개 언어와 수백 개 민족, 다양한 계급과 문화가 얽혀 있는 그 땅에서는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진리들이 나란히 존재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관심은 많다.
그 관점에서 힌두교는 내게 의외로 깊은 울림을 줬다.
특히, 예수를 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열린 마음과 다층적인 신관(神觀)은, 현대 사회가 마주한 극단적 이분법 — 진보냐 보수냐, 동양이냐 서양이냐, 정통이냐 이단이냐 — 그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는 하나의 통찰 같았다.

우리 사회는 갈수록 서로의 생각에 날을 세운다.
‘다르다’는 건 곧 ‘틀렸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너무나 흔하다.

그런 세상 속에서 힌두교식 시선은 오히려 더 성숙하게 느껴졌다.
"예수도 신일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어쩌면 ‘진리는 하나지만, 그 모습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는 그들의 오랜 지혜를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예수를 힌두교 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
그 너그러움이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