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도심을 걷다보면 바로 머리 위에서 끊임없이 덜컹거리는 L 열차입니다.

L은 "elevated(고가)"의 줄임말로, 노선의 대부분이 도시 거리 위로 높은 선로를 따라 운행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즉, 지상보다 높이 올라간 고가 철도(Elevated Railway)를 의미합니다. 초기에 시카고 대중교통은 대부분 고가(Elevated)로 건설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El → L 로 줄여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관광와서 보면 이게 영화 세트장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출퇴근하는 시카고 주민에게는 "아... 또 시작이네" 싶은 소음과 진동의 실체죠. 도시 위를 거미줄처럼 엮어놓은 레일은 North Side에서 South Side까지, 서쪽 교외까지 다 연결해 놓았는데 문제는 너무 많이 연결해놨다는 것입니다.

역 이름도 Addison이 두 개, Washington 두 개, Lake, State... 이름만 보면 다 가까울 것 같지만 방향만 잘못 타면 반대편 끝에 떨궈지는 건 한순간입니다. 같은 역인데 한쪽은 지하, 옆 라인은 고가 위로 지나가고, Orange는 공항으로 도망가고, Blue는 O'Hare로 직진해버립니다.

처음 시카고 온 사람은 머릿속에서 노선도가 꼬이고 뒤틀리고 기어 다니는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도시인가 미로인가' 싶을 정도죠.

본격적으로 Loop 구간에 들어가면 더 참 재미있습니다. 레일이 시내 중심을 둥글게 감싸는데 딱 보면 도시가 쇠로 된 팔찌를 낀 것 같습니다. 멋있긴 합니다, 사진으로 보면요. 하지만 현실은? 건물 사이로 열차가 바로 코앞에서 지나가며 금속음이 찢어지게 울립니다.

사무실에서 회의하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말이 끊기고, 줌 미팅 중이면 "Sorry, the train is passing"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플랫폼도 한층, 두층, 지하층 섞여 있어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맞는 방향인가?" 스스로에게 세 번쯤 묻게 됩니다.

열차 도착 방송이 들려 뛰어갔는데 자세히 보니 반대 방향이거나, 내가 탈 열차는 10분 뒤에나 온다는 현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역 아니면 헤매게 됩니다. 관광객에게는 도시 탐험이고 여기 사는 로컬에게도 스트레스 입니다.

색깔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줄 알았던 노선표는 사실 사람을 우롱하는 색깔 퍼즐에 가깝습니다. Red는 그나마 남북으로 곧게 뻗어 "오케이, 넌 이해했다" 싶은데, Brown과 Purple은 Loop 한바퀴 돌았다가 갑자기 방향 틀고, Green은 서쪽 갔다가 남쪽으로 휘고, Pink는 엇갈리기로 유명합니다. "어차피 Loop 가면 연결되지 않을까?" 싶은 순간, 열차가 Loop를 안 돌고 직진해버리는 장면도 종종 목격됩니다.

그럼에도 이런 혼돈이 시카고 Downtown을 활기 있게 움직이게 합니다. 레일이 흔들리고, 열차가 도시 사이를 가르고, 카페에 앉아 있으면 창밖으로 금속 덩어리가 쓱 지나가며 '여기 진짜 도시다'라는 감각을 생기게 합니다.

조용하고 정돈된 교통을 자랑하는 도시는 많지만, 시카고는 거친 소음, 진동, 속도로 정체성을 증명합니다. 욕하면서도 타고 헤매다가도 다시 찾아가고 어느 순간 이 소리가 없으면 이상하게 허전해지는 도시.

결국 시카고의 기차 노선은 잘 정리된 지도보다 뒤엉킨 실타래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실타래 속에 이 도시의 매력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살아 있고 시끄럽지만 매력적인 풍경. Loop를 달리는 그 정신없는 기차가 바로 시카고의 심장 박동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