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 나는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때는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내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벌써 시간이 흘러 올해 예순을 넘긴 내가 그때를 돌아보면, 마음이 묘하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도 많고, 나중에 온 사람도 많지만,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왔던 희망과 두려움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살던 시절, 동네 어른들이 모이면 늘 "저 집 아들이 미국 유학 갔다더라", "딸이 이민을 갔다더라" 하며 서로 부러움과 시기를 섞어 이야기하곤 했다.
그 시절 미국은 나에게 끝없는 기회의 땅처럼 보였다. 넓은 집, 자유롭게 공부하는 아이들, 자가용이 일상인 풍요로운 나라.
하지만 막상 와보니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다웠지만, 손에 닿으려 하면 자꾸 멀어지는 나비 같았다.
1980년대 한국은 여전히 가난과 불안이 남아 있었고, 거리마다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던 시절이었다.
독재의 그늘 아래서 늘 시위가 있었고, 사람들은 답답한 공기를 마시며 살았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내 아이들이 태어나면 이런 곳이 아닌, 더 넓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교육받길 바랐다.
그리고 나 자신도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리 아버지가 내린 결정으로 온가족이 미국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공항에서 이민 가방을 꾸려 들던 날, 무거운 트렁크 안에는 옷보다도 더 무거운 기대와 불안이 들어 있었다. 비행기 창밖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길이 정말 내 팔자일까?"
미국 땅에 발을 내딛던 첫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영어 한 마디 못해 공항 직원에게 손짓 발짓으로 길을 묻던 내 모습,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말귀를 못 알아들어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만 끄덕이던 기억.
결혼해서 남편은 직장에서 나는 동네 몰에있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은행에 다녀오다가 강도를 두 번이나 당한 적도 있었고, 억울하게 손해를 본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이 영어로 자유롭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이게 내가 이민 온 이유였구나." 내 꿈이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가 결국 이민의 가장 큰 목적이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가끔은 생각한다. 만약 한국에 그대로 남았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과 한동네에서 늙어가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아 헤맸을까.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지만, 어떤 선택은 마치 기다리고 있던 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 땅에 발을 내딛던 순간 나는 묘하게도 "아, 이게 내 운명이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 운명은 달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힘든 날들조차 결국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내 또래 친구들도 다들 사연은 달랐지만, 마음속 소망은 같았다.
누군가는 자녀 교육 때문에, 누군가는 사업 기회를 찾아, 또 누군가는 그저 새로운 인생을 원해서 이곳에 왔다. 이유가 뭐든 결국 우리를 이끌었던 건 "내 아이만큼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하자"라는 간절함이었다. 그 소망이 우리를 태평양 건너 이 낯선 땅에 세워놓았다.
지금 돌아보면 이민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헛되지는 않았다.
누가 나에게 무엇을 이루었냐 묻는다면, 나는 큰 부자도 아니고 내세울만한 업적도 없지만, 내 가족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아이들이 당당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미국 이민 와서 이루려던 것이고, 결국 이루어낸 것이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네 팔자는 네가 만드는 거다.
하지만 네 앞에 오는 길도 네 운명이지." 지금 생각하면 참 묘한 말이다. 팔자와 운명은 서로 다른 듯 닮아 있었다.
내가 이민을 오게된 건 내 팔자였을지 모르지만, 그 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경험은 분명 운명이었다.
이제 예순이 넘은 나는 거창한 꿈보다는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미국 땅에서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지만, 결국 나는 또 다른 나의 삶을 발견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가 미국 이민 와서 이루려 했던 건 결국 아이들의 미래였고, 그것이 팔자든 운명이든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