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에 살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넓다'는 말 그 자체입니다.
특히 동쪽 지역은 차를 몰고 조금만 달려도 사방이 푸른 초원과 끝이 안 보이는 길로 이어지죠. 한국에서 나고 자라온 제 눈에는 이 풍경이 아직도 낯설게 다가옵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아파트 숲 사이로 겨우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과 비교하면, 이곳의 하늘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크기로 다가오거든요.
이곳의 특징은 잘 정리된 커뮤니티 하우스 단지가 줄지어 있다는 겁니다. 한 단지를 지나면 또 다른 단지가 나오고, 그 사이사이엔 놀라울 정도로 큰 잔디밭과 나무들이 펼쳐져 있죠. 주말마다 이웃들이 잔디 깎는 기계 소리를 내며 집 앞을 가꾸는 풍경은 이제 텍사스 생활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집과 집 사이의 간격이 한국 사람 눈에는 "와, 이 정도면 거의 시골 아닌가?" 싶을 만큼 넓다는 거예요. 하지만 현지인들은 그게 '적당한 거리감'이라고 말하더군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도 필요하면 언제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거리. 그게 이곳의 묘미입니다.
조금 더 시골로 들어가면, '에이커'라는 단위로 땅을 이야기하는 농장지대가 나옵니다. 한국에서 평 단위로 집터를 재던 것과 달리, 여긴 최소 수천 평은 되어야 '작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말 그대로 땅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니까요.
소를 키우거나 말을 두는 사람들도 많고, 직접 옥수수나 호박 같은 작물을 재배하는 집도 흔합니다. 덕분에 도로를 달리다 보면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장면이 일상처럼 보이죠.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 대신, 여기서는 로컬 농장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을 파는 작은 마켓이 사람들 발길을 붙잡습니다.
한국은 인구 밀도가 워낙 높다 보니 늘 복잡하고 붐비는 게 당연했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사람과 부딪히는 건 일상이었죠. 그런데 텍사스 동쪽에서는 차를 타고 한 시간 이상 달려도 마주치는 차량이 몇 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엔 낯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숨통이 트인다'는 느낌을 줍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더군요. 도시의 혼잡함 속에서 쌓이는 스트레스 대신, 넓은 초원에서 오는 안정감이 제 마음을 채워줍니다. 한국에서라면 꿈에도 못 꿀 "내 집 앞마당에 나무를 심고, 그늘 아래 그릴을 두고 바비큐 하는 삶"이 여기서는 평범한 주말이 되니까요.
행복의 밀도
제가 느끼는 행복의 포인트는 바로 '공간의 밀도'에서 옵니다.
한국에서는 공간이 부족하다 보니 집도, 도로도, 심지어 사람의 사생활까지 촘촘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텍사스 동쪽에 와서 살아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넉넉하니 마음의 간격도 넓어지는 걸 느낍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조급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끝없는 목장과 나무들을 보다 보면 "아, 오늘 하루도 괜찮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뉴욕에 살다가 지인의 소개로 텍사스에서 3년째 살아보니 이런 환경에 살게 된 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도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한국의 붐비는 거리와 야식 문화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텍사스 동쪽의 넓은 땅이 주는 고양감은 그런 아쉬움을 덮고도 남습니다.
이곳에서는 '내가 얼마나 넓은 땅을 가졌느냐'보다, '얼마나 넓은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 광활한 초원과 하늘이 매일같이 저에게 선물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