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저녁 산책길에 한 집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주황색 호박들 사이에 청록색으로 칠한 호박 하나가 놓여 있었거든요.
처음엔 그냥 색다른 장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꽤 분명한 뜻을 가진 신호였고, 그 뒤로는 동네를 걸을 때마다 이 색을 찾게 되더군요.
이 청록색 호박은 '틸 펌킨 프로젝트(Teal Pumpkin Project)'의 표시입니다. 이 집에는 사탕 말고 먹지 않는 선물도 준비돼 있다는 뜻입니다.
청록색, 즉 틸 컬러는 원래 식품 알레르기 인식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핑크 리본이 유방암을 떠올리게 하듯, 이 색도 하나의 약속처럼 쓰이는 셈입니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2012년 가을, 테네시 동부의 한 엄마가 집 앞에 청록색 호박을 내놓은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베키 바살론(Becky Basalone)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지역 식품 알레르기 모임인 FACET(Food Allergy Community of East Tennessee)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막내아들이 땅콩, 우유, 견과류 등에 심한 알레르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할로윈이 되면 아이는 문 앞마다 사탕을 거절하거나 자기 병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가족은 사탕과 함께 작은 장난감을 따로 준비해 아이들이 원하는 쪽을 고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알리는 표시로 큰아들이 청록색으로 칠한 호박을 현관에 두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전국으로 키운 건 비영리단체 FARE(Food Allergy Research & Education)입니다. FARE는 2014년 할로윈부터 이 캠페인을 전국 단위로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반응은 빨랐습니다. 소셜미디어를 타고 퍼지면서 첫해에만 FARE 페이스북에서 500만 명 넘게 이 소식을 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참여 가정을 지도에 등록하는 방식으로도 운영됩니다. FARE에 따르면 2024년 지도에는 1만 2500곳이 넘는 장소가 올라왔고, 미국 50개 주와 워싱턴 DC가 모두 포함됐습니다.
숫자를 보고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집 앞 호박 하나에서 시작된 일이 십여 년 만에 이 정도 규모가 됐으니까요.
왜 이렇게까지 퍼졌을까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합니다. 해당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FARE는 미국 아이 13명 중 1명꼴로 식품 알레르기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반에 두세 명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동네 아이들 사이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숫자입니다.
대상이 알레르기 아이들만은 아닙니다. 당뇨가 있거나 셀리악병이 있는 아이, 튜브로 영양을 공급받는 아이에게도 사탕 바구니는 그림의 떡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할로윈은 즐거운 날이면서 동시에 거절의 연속인 날입니다. 받아도 못 먹는 사탕을 들고 돌아오는 기분은 어른도 짐작이 갑니다.
참여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청록색 호박이나 인쇄용 안내문을 집 앞에 두고, 먹지 않는 선물을 준비하면 됩니다.
FARE가 강조하는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사탕과 비식품 선물을 같은 그릇에 섞지 말고 따로 담으라는 겁니다.
이유가 납득이 갑니다. 섞여 있으면 사탕 성분이 장난감에 묻을 수 있고, 아이가 굳이 자기 사정을 말하지 않고도 고를 수 있어야 하니까요.
선물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티커, 야광 팔찌, 분필, 연필, 거미 반지 같은 작은 물건이면 충분합니다. 아이 나이를 생각해 너무 작은 부품이 달린 장난감만 피하면 됩니다.
사탕을 아예 끊으라는 캠페인도 아닙니다. 기존 사탕은 그대로 두고 선택지를 하나 더 얹는 방식이라 부담이 적습니다.
요즘은 이것 말고도 할로윈 색깔 신호가 여럿 생겼습니다. 파란 바구니를 든 아이를 보면 말이 서툴 수 있으니 기다려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보며 사업하는 사람 입장에서 느낀 게 있습니다. 미국 동네 문화의 힘은 정부 정책보다 이런 자발적인 약속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법으로 정한 것도 아닌데, 이웃들이 알아서 신호를 정하고 지킵니다. 규칙이 단순하고 비용이 적으니 참여 문턱도 낮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이 오히려 오래간다고 봅니다.
우리 한인 가정도 충분히 참여할 만합니다. 한국 마트에서 파는 작은 문구류나 캐릭터 스티커는 의외로 아이들 반응이 좋습니다. 이웃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트는 계기가 되는 건 덤입니다.
저라면 올해는 사탕 그릇 옆에 작은 그릇 하나를 더 두겠습니다. 비용은 몇 달러 더 들지만,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아이 하나가 웃고 돌아간다면 남는 장사입니다.
할로윈까지 3주 남짓 남았습니다. 산책하다 청록색 호박을 보시면, 그 집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한번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부산영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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