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었던 인디언 부족을 꼽자면 단연 체로키(Cherokee)입니다.
지금은 오클라호마나 노스캐롤라이나 쪽에 체로키 네이션이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 그들의 뿌리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북서쪽, 블루리지 산맥과 피드몬트 지역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체로키족은 이 지역에서 터전을 이루며 농사, 사냥, 무역을 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남동부 인디언 문화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체로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체로키족의 삶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산과 강, 숲을 신성한 존재로 여겼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믿었습니다. 사냥을 할 때는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남은 것은 다시 숲에 돌려주는 식으로 생태의 균형을 중시했습니다. 주요 식량은 옥수수, 콩, 호박으로, 이 세 가지를 '세 자매(Three Sisters)'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이 작물들이 서로의 성장을 도와준다고 믿었죠. 체로키 여성들은 농사를 지었고, 남성들은 사냥과 전투를 담당했습니다. 사회 구조는 모계 중심이어서, 가문의 계보는 어머니 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체로키족은 단순한 원시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16세기 유럽 탐험가들이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이미 체로키 사회는 정교한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마을마다 '의식의 집(Council House)'이 있었고, 부족의 지도자들이 모여 계절마다 회의를 열었습니다. 평화의 시기에는 백색 족장(White Chief)이, 전쟁 때는 붉은 족장(Red Chief)이 마을을 이끌었는데, 이는 체로키의 사회가 평화와 전쟁의 균형을 중요시했음을 보여줍니다.

유럽인과의 첫 만남은 비교적 평화로웠습니다. 영국인과 프랑스인 상인들이 모피 무역을 하며 교류를 시작했죠. 그러나 식민지가 확장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습니다. 백인 정착민들이 체로키의 땅을 점점 잠식했고, 총기와 술, 질병이 부족 사회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중반, 체로키는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가 다시 식민군과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체로키 전쟁(Cherokee War)'은 결국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30년대의 '눈물의 길(Trail of Tears)'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인디언 이주법'을 통해 체로키를 비롯한 남동부 인디언들을 강제로 서쪽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수천 명의 체로키족이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끌려나와 오클라호마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혹한과 굶주림, 질병으로 약 4,000명 이상이 그 길 위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도 체로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부족 역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로키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클라호마로 옮겨간 이들은 새 땅에서 체로키 네이션을 세우고, 자신들의 언어와 전통을 지키며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세쿼야(Sequoyah)라는 인물이 만든 독자적인 음절문자를 통해 발전했습니다. 세쿼야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체로키 문자 체계를 만들어, 부족 전체가 문자를 쓸 수 있게 했습니다. 이 덕분에 체로키는 19세기 초 이미 신문을 발행하고 기록 문화를 유지한, 당시로서는 매우 발전된 공동체였습니다.
오늘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체로키족의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 북서부의 오코니(Oconee) 지역과 피컨스(Pickens) 지역은 체로키가 살던 땅이었고, 그들의 이름을 딴 지명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코니'라는 단어는 체로키어로 '물가의 땅'을 뜻합니다. 체로키 전통공예 전시회나 문화축제도 열리며, 부족의 후손들이 직접 방문객에게 조상들의 문화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체로키족의 유산은 단지 사라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이 지역의 정체성에도 깊게 스며 있습니다. 자연을 존중하는 삶, 공동체 중심의 가치, 그리고 외세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강한 생명력. 이것이 바로 체로키가 남긴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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