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자스는 미국사에서 한 번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노예제 논쟁 때문입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국책사업이었습니다. 이 철도는 캘리포니아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캔자스와 네브래스카는 철도의 핵심 경로로 선정되었습니다.

캔자스는 수천 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땅이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오세이지, 키카푸, 카와 같은 부족들이 살았으며, 대초원에서 농사와 사냥을 주로 했습니다. 16세기 스페인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방문했고, 이후 프랑스와 미국의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황무지로 남아 있었으며, 연방정부는 이를 개발하고 철도 노선을 통과시키기 위해 1854년 캔자스를 준주로 승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캔자스는 미주리 협정에 따라 36도 30분선 이북에 위치해 노예제를 금지하는 지역이었고, 이곳에 정착한 대부분의 개척자들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통과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년)은 노예제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캔자스는 노예제 찬반 세력 간의 극심한 갈등과 폭력 사태로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1861년 1월 29일,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로서 미국의 34번째 주로 가입했습니다. 남북전쟁 중에는 노예제 반대의 상징적 역할을 했습니다. 철도 건설과 함께 농업, 특히 밀 생산이 주된 경제 활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국의 빵바구니(Breadbasket of America)"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20세기에는 항공 및 에너지 산업도 발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