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Boston University College of Fine Arts 졸업생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미대 진학을 결심했을 때, 아버지는 너가 재능이 있으니 네 길을 가도좋다...고 말하면서 눈빛은 살짝 걱정이 섞여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와서 보면, 그 걱정이 괜한 건 아니었단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미국에서 Fine Art 전공이라는 건, 진심을 담아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멋지면서도 가장 불안정한 전공입니다.

특히 30년 전, 그러니까 1990년대나 2000년 초반만 해도 이 길은 지금보단 조금 더 단순했어요. 화가로서 명성을 얻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갤러리에 들어가는 루트, 작가로서 활동하는 방식, 그리고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고용되는 시스템은 그래도 존재했어요.

한마디로, "비정규직이라도 시장은 있었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지금은요? AI 생성 기술들이 모든 걸 바꿔놨어요.

예전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진짜 특별한 존재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AI가 풍경화도 그리고, 캐릭터도 만들고, 애니메이션도 뚝딱뚝딱 만드니까...

우리 같은 순수미술 베이스 아티스트들은 오히려 더 애매해졌어요.

화려한 소프트웨어 테크닉은 없고, 상업적인 디자이너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콘셉추얼한 현대미술 작가도 아닌...

그래서 요즘 미대 졸업생들은 졸업하자마자 고민에 빠져요.

"나 이거 계속 해도 되는 걸까?"

"이 길이 나한테 가능한 길인가?"

"내가 진짜 '아티스트'인가, 아니면 그저 전공이 미술인 사람인가?"

순수미술 쪽으로 간 친구들은, 현실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루트가 굉장히 제한적이에요. 작가 레지던시를 다니거나, 갤러리와 컨택을 하고, 아트페어에 참가하거나, 아예 독립적으로 SNS 기반 판매를 시도하죠. 문제는 이 모든 게 경제적 안정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생계를 위해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거나, 프리랜서 디자인을 하면서 붓을 잡는 게 현실이에요. 일러스트레이터 쪽은 사정이 좀 낫지만, 여기도 상황이 만만치는 않아요. 출판사나 에이전시에서 일러스트를 외주로 맡기긴 하지만, AI 생성 이미지와 경쟁하는 시대예요.

"당신만의 터치가 필요해요"라고 말해주는 클라이언트는 드물고, "비슷한 그림을 AI로 5초 만에 만들 수 있는데요?" 하는 식의 푸대접도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절대 단순한 기술자들이 아니에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세상을 보는 시각을 계속 훈련하고 표현하는 일이에요. 그림이란 건 결국 '시대의 언어'거든요.

텍스트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미지로 전달하고, 사람의 감정, 불안, 환희, 고통 같은 걸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일.

그건 여전히,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앞으로 우리 같은 아티스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결국, 자기 언어를 가진 이미지 메이커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처럼 누가 우리를 뽑아주길 기다리는 시대는 아니고, 스스로 브랜드가 되고, 자기 세계를 구축해야 먹고사는 시대예요.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는, 다행히도 SNS, 유튜브, 온라인 마켓플레이스, NFT (이쪽은 거의 망했지만...), 그리고 전시 공간을 직접 빌려 만드는 DIY 전시문화처럼 이전에는 없었던 방식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요, 요즘의 Fine Art 전공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업가'가 되어야 해요. 붓 하나로만 승부 보는 시대는 지났어요.

물론, 이게 꼭 좋다는 건 아니에요. 사실 좀 버겁고, 외롭고, 불안한 길입니다.

그래도 전,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싶고, 저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표현하고 싶어요.

그게 저 같은 Fine Art 전공자들이 가진 고집이고, 어쩌면 현실을 버티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