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봄이되고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올 무렵, 솔직히 프롬은 약간 불편한 행사였다.

당시엔 프롬이란 게 무조건 이성 파트너를 구하는 게임 같았다. 누구랑 가느냐가 인기 척도였고, 누가 리무진 불렀는지, 드레스는 누가 더 화려한지, 음악은 뉴키즈온더블럭이나 보이즈투맨 같은 그룹이 메인 플레이리스트에 깔리고, 중간에 슬로우댄스 때는 등허리 간격 최소 15cm 유지하라는 부모님의 말도 들어야했다.

그래서일까. 내 주변 아시안 남학생 친구들, 다들 눈치를 많이 봤다. 프롬 시즌이 오면 대부분은 한국 여학생들에게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말하자면 문화권 내에서 안전하게(?) 해결하려는 본능 같은 거였지.

나도 그랬다. 유난히 조용하고, 긴머리가 잘 어울리던 한국 여자아이한테 쪽지로 "프롬 갈래?"라고 물어봤다. 그때 나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게 그다시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한인 여자애들은 우리같은 남자들과 분위기가 좀 달랐다. 솔직히 예쁘고, 영어도 잘하는 한국여자에게는 백인, 히스패닉, 흑인계 그리고 풋볼, 농구팀의 주전까지 줄줄이 프롬을 신청하는것을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단순한 연애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체성', '인종', '소속감', '자존감'이 오묘하게 얽힌 문제였다. 당시 우리는 뭔가 이방인 같았고, 우리만의 문화 속에서 프롬을 소화하고 있었던 셈이다.

백인친구들은 낭만적이고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프롬을 살았다면, 우리는 그저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무대 조명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요즘 밀레니얼 말기 고등학생들의 프롬데이트한테 프로포잘은 완전히 다른 방식이라고 한다.

"나랑 프롬 가줄래?"를 넘어 이제는 "우리끼리 프롬 갈래?" 시대다. 이성 중심, 커플 중심이 아니라 '나만의 스타일'이 핵심이다. 데이트 없는 프롬 참석이 아무렇지도 않고, 심지어 친구 5~6명이 '플래토닉 프롬 팩트'를 맺고 단체로 가는 경우도 많다.

한마디로 '혼자 놀기의 미학'이 프롬에도 침투한 것이다.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프롬에 가지 않고 대신 "프롬 대안 파티(anti-prom party)"를 열기도 한다. 한창 민감한 정치 이슈와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어떤 학교는 '젠더 뉴트럴' 드레스코드를 도입했고, 어떤 학생은 정장 대신 드래그 퀸 복장으로 등장해 SNS 스타가 되기도 했다.

음악도 달라졌다. 우리가 빠졌던 R&B 발라드 대신, 지금은 틱톡에서 핫한 플레이리스트가 메인이다. "춤추자!"보다는 "이걸 찍어서 스냅챗에 올리자!"가 중심이다. 춤은 덜 추고, 영상은 더 찍는 시대. 어쩌면 프롬의 중심이 '상대'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동한 셈이다.

패션도 진화했다. 우리 땐 거의 공식처럼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롱드레스였지만, 요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입는다. 남학생이 핑크색 슈트에 펄 메이크업을 하고 오기도 하고, 여학생은 드레스 대신 수트와 타이를 멋지게 매기도 한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내 기준에 충실한' 멋을 선보이는 프롬이다.

또 재미있는 건, Prom proposal(프롬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는 이벤트)의 변화다. 90년대만 해도 몰래 카드 건네고 장미꽃 한 송이 정도였는데, 요즘은 '프롬포절'이 거의 작은 뮤직비디오 수준이다. 풍선, 플래카드, 플래시몹, 심지어 유튜브 생중계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 화려한 제안을 거절당해도, 요즘 애들은 '그냥 컨텐츠 하나 찍은 거'라고 툭 털고 넘어가는 게 참 다르다.

나는 가끔 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요즘 프롬은 나 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다양하고, 솔직한 행사라는 걸 느낀다. 물론 누군가는 '전통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학생 개개인이 자신을 표현하는 장이 되었고, 어떤 형태로든 "인생 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이벤트라는 점은 똑같다.

결론? 프롬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커플의 무도회'가 아닌, '개성의 쇼타임'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만약 내가 지금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볼때 이제 아시안 남성들도 프롬 데이트, 프롬 로맨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K팝, K드라마, 아시안 콘텐츠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주목받으면서 나는 지금의 이 변화가 부럽기도 하다. 나도 한 번쯤은 '프롬에서 주목받는 아시안 남자 주인공'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지.

뭐 어쩌겠나, 그 시절엔 우리가 몰랐던 용기와 자신감이, 지금 세대에게는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