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대추야자’에 푹 빠져 있다. 미국 마트에서도, 코스트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과일의 정식 이름은 Medjool Date.
겉보기엔 쭈글쭈글한 말린 자두 같지만, 한입 베어 물면 진득하고 달콤한 식감이 마치 캐러멜처럼 녹아든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 date가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대추’와는 다르고, 이란에서 먹는 date와는 또 같은 듯 다른 느낌이라는 점이다.
이 과일 하나를 두고 문화권마다 어떻게 다르게 인식하고, 먹고, 활용하는지를 들여다보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란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추야자 생산국이다. 고온건조한 기후 덕분에 이란 남부 지방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date가 식량 자원으로 사랑받아왔다.
이란에서는 date를 단순한 간식 이상으로 여긴다. 라마단 기간에는 금식을 마친 후 가장 먼저 먹는 음식으로 date를 택한다. 혈당을 빠르게 회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란의 date는 종류가 정말 많다는 것.
Deglet Noor, Mazafati, Piarom, Zahedi 등등 — 각각의 품종이 갖는 단맛, 식감, 수분량이 다르다.
특히 Mazafati는 비교적 촉촉하고 부드러워서, 한입에 꿀처럼 녹아드는 맛이 있다. 이란 사람들은 이 date를 차와 함께 즐기기도 하고, 아몬드나 호두를 속에 넣어 건강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
심지어 요리에 단맛을 더하는 데 설탕 대신 사용하기도 하니, 말 그대로 삶과 함께하는 과일이다.
그에 비해 미국에서의 date는 조금 더 ‘건강 간식’ 또는 ‘슈퍼푸드’로 인식된다.
코스트코에서 대량으로 파는 Medjool Date는 운동 후 에너지 보충용으로 먹기도 하고, 비건 베이킹에서 설탕 대용으로 자주 쓰인다. 미국에서는 date를 그냥 생으로 먹기보다는 땅콩버터를 넣거나, 다크초콜릿에 감싸 디저트처럼 만들어 먹는 게 트렌드다. 어떤 사람들은 스무디에 넣어 자연스러운 단맛을 더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냉장고에 date를 얼려 두었다가 시원하게 한두 개씩 꺼내 먹는 걸 좋아한다.
그 쫀득함과 달콤함은 아이스크림 한 스푼 부럽지 않다. 무엇보다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죄책감 없는 디저트라는 점에서 무척 만족스럽다.
우리가 익숙한 한국 대추는 date라기보다 ‘jujube’에 가까운 품종이다. 생으로 먹을 수 있을 만큼 수분이 많은 미국의 date와 달리, 한국 대추는 대부분 말려서 차로 끓여 마시거나, 한약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옛 어른들은 몸이 찬 사람에게 따뜻한 대추차를 끓여줬고, 명절 음식인 약과나 한과에도 대추는 빠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떡에 올리거나, 찜 요리의 고명으로 올라가 있기도 하다. 단맛은 덜하지만 특유의 깊은 향과 단단한 식감은 분명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렇게 보니, date라는 단어 하나가 이란에서는 민족 정체성과 닿아 있고, 미국에서는 웰빙 트렌드의 상징이며, 한국에서는 전통과 건강을 상징하는 약재로 존재한다. 같은 과일, 혹은 비슷한 과일이지만, 누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쓰임은 천차만별이다.
사실 ‘대추야자’를 처음 접했을 땐, “이게 대추야?”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세 나라의 대추가 각자의 삶 속에서 의미 있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우리는 흔히 ‘같은 과일은 같은 맛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는 땅과 시간, 문화의 켜가 깊게 배어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date 하나를 먹을 때도 왠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이란의 사막을 걷는 기분, 미국 헬스 블로거의 냉장고를 훔쳐보는 기분, 그리고 한국의 한약방 안쪽에서 은은한 한약 냄새에 묻힌 기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