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학교 행사나 야구장에서 국가 대신, 혹은 국가 다음으로 자주 들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America the Beautiful이죠.
저도 처음엔 그냥 애국 찬송가 정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이 노랫말이 콜로라도스프링스 바로 뒤에 있는 파이크스 피크 꼭대기에서 시작됐다는 얘기를 듣고 좀 놀랐습니다.
이야기는 1893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사추세츠 웰즐리 칼리지의 영문학 교수였던 캐서린 리 베이츠가 휴가를 내고 서쪽으로 길을 떠났거든요.
목적지는 콜로라도스프링스였습니다. 콜로라도 칼리지에서 열린 여름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로 한 거였죠.
가는 길에 그녀는 시카고에 들렀습니다. 마침 그해 시카고에서 콜럼버스 세계박람회가 열리고 있었고, 하얀 건물들이 늘어선 이른바 화이트 시티를 직접 봤다고 해요.
나중에 노랫말에 나오는 하얗게 빛나는 도시 이미지가 바로 그 박람회장에서 왔다는 게 정설입니다. 대평원과 산맥만 노래한 줄 알았는데, 도시의 꿈도 같이 들어가 있었던 거죠.
그리고 7월의 어느 날, 베이츠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파이크스 피크에 오르기로 합니다. 해발 1만 4천 피트가 넘는 산입니다.
지금이야 차로 정상까지 올라가지만 그때는 사정이 달랐어요. 일행은 프레리 왜건을 빌려 타고 올라가다가, 정상 근처에서는 마차를 버리고 노새로 갈아탔다고 베이츠가 직접 회고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대목에서 웃음이 났습니다. 마차 타고 가다 노새로 갈아타는 대학 교수라니, 꽤 터프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됩니다. 동쪽으로는 끝없는 평원이, 서쪽으로는 겹겹이 이어진 로키 산맥이 펼쳐지죠.
그 광경을 보고 시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다만 어디서 마저 썼는지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산에서 내려와 묵던 앤틀러스 호텔 방에서 첫 연을 적었다는 설명이 있고, 내려오는 길에 수첩에 써 내려갔다는 설명도 있어요. 확실한 건 시작점이 파이크스 피크였다는 겁니다.
재미있는 건 이 시가 바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2년 동안 수첩 속에 묻혀 있었거든요.
원래 붙여둔 가제가 Pikes Peak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산 이름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으려 했을 만큼 그날의 인상이 강렬했다는 뜻이겠죠.
처음 지면에 실린 건 1895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교회 주간지인 The Congregationalist에 America라는 제목으로 실렸죠.
베이츠는 그 뒤로도 가사를 계속 손봤습니다. 1904년에 두 번째 버전을 냈고, 지금 우리가 부르는 최종본은 1913년에 완성됐습니다.
음악 쪽 이야기는 또 따로 있어요. 지금 멜로디는 뉴저지의 오르간 연주자 새뮤얼 A. 워드가 1882년에 다른 찬송가용으로 만든 Materna라는 곡입니다.
시와 곡은 나중에 짝이 지어졌고, America the Beautiful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출판된 건 1910년이었습니다. 처음 짝지어진 시기는 그보다 이른 1904년 무렵으로 보는 자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짠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워드는 1903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니까 작사가와 작곡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워드는 자기 멜로디가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래가 되는 걸 끝내 보지 못했죠.
저는 이 대목이 이 노래의 진짜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따로 만든 것이 합쳐져서 하나의 나라 노래가 됐다는 것, 그게 딱 미국다운 방식 아닌가요.
위에서 누가 계획하고 지시한 노래가 아니에요. 한 교수가 여행길에 느낀 감동, 한 오르간 연주자의 멜로디, 그리고 그걸 골라 부른 사람들이 만든 겁니다.
콜로라도스프링스 사람들도 이 인연을 잊지 않았습니다. 베이츠의 등정 100주년이던 1993년에 지역 사업가 코스타스 롬보코스가 기념비를 기증했고, 그 비석이 파이크스 피크 정상에 세워졌어요.
그러니 다음에 파이크스 피크에 올라가시면 도넛만 사 먹고 내려오지 마시고 그 기념비도 한번 찾아보세요. 정상 공기가 얇아서 숨은 좀 차실 겁니다.
저라면 노래 한 소절쯤은 속으로 흥얼거려 보겠어요. 베이츠가 봤던 그 평원과 산맥을 똑같은 자리에서 보는 거니까요.
이민자로 살다 보면 이 나라 노래를 부를 때 어딘가 남의 옷 입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이 노래는 좀 다르게 다가옵니다. 국가처럼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땅과 하늘,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길 바라는 마음을 노래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국가인 Star-Spangled Banner보다 이 노래가 더 좋습니다. 산꼭대기에서 숨 몰아쉬며 내려다본 한 사람의 감탄, 그게 이 노래의 출발점이라는 걸 알고 나니 더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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