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리세이즈 산불 악몽도 생생한데 이번엔 말리부가 불탄다. - Santa Monica - 1

산타모니카에 살면서 요즘 가장 듣기 싫은 말이 10월만 되면 지긋지긋한 그놈의 산타아나 바람이 분다는 소리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을바람이 불면 단풍 구경을 가지만, 여기 남가주에서는 바람이 분다고 하면 일단 휴대전화부터 확인합니다.

산불 경보가 떴는지, 대피 명령이 내려왔는지, 전기회사가 전기를 끊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작년 1월 팰리세이즈 대화재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시작된 불길이 주택가를 집어삼키고,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걸어서 대피하던 장면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산타모니카에서 차로 몇 분이면 가는 동네입니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재난도 아니고 바로 우리 옆동네가 불타버린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서쪽 말리부에서 산불 소식이 들립니다. 브라이슨 화재(Bryson Fire)라는 이름까지 붙었습니다. 요즘 아주 시끄러워요 연기에 소방차, 뉴스 헬리콥터에, 소방 헬리콥터, 비행기 난리도 아닙니다.

보도에 따르면 강한 산타아나 바람과 낮은 습도, 바짝 마른 식생 때문에 진화 작업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소방관들은 밤새 불길과 싸우고, 주민들은 대피 명령과 경보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말리부 하면 떠오르는 게 뭡니까.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대저택, 수백만 달러짜리 부동산, 할리우드 유명인들이 사는 해변 마을 아닙니까.


산불 이야기가 나오면 엘니뇨 때문이라는 설명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남가주 산불을 전부 엘니뇨 탓으로 돌리는 건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올해처럼 평소보다 연초에 비가 많이 와도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가 여름에 말라버리면 훌륭한 산불 연료가 됩니다.

비가 적게 와도 문제입니다. 산과 계곡이 바싹 마르니까요. 뭐 이젠 비가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전기회사입니다.

서던캘리포니아 에디슨(Southern California Edison)은 바람이 강하고 습도가 낮으면 예방 차원에서 전기를 끊겠다고 합니다.

이른바 공공안전 단전(PSPS)입니다. 실제로 이번에도 말리부 일부 지역은 전력이 차단됐습니다.

전기회사 입장도 이해는 갑니다. 강풍에 전선이 끊어져 땅에 떨어지고 불꽃이 튀어 태워버리면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차라리 전기를 끊어버리는 게 회사 입장에서는 속 편할 겁니다.

그런데 주민들은 무슨 죄입니까?

캘리포니아에서 비싼 전기요금 꼬박꼬박 내고 사는데 정작 바람이 좀 세게 불면 전기를 못 쓴답니다.

전기는 공급받으라고 돈을 내는 건데, 이제는 전기를 공급하지 않는 것도 안전 서비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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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무작정 전기를 계속 공급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전선 때문에 불이 나면 그때는 왜 미리 전기를 끊지 않았느냐고 따질 테니까요.

이것도 참 기가 막힌 딜레마입니다.

산불이 지나간 뒤에도 고생은 끝나지 않습니다. 겨울비가 쏟아지면 불에 탄 산비탈에서 토사가 흘러내릴 수 있습니다.

산불 걱정이 끝나면 산사태 걱정이 시작되는 겁니다.

가을에는 산타아나 바람, 겨울에는 산불과 폭우, 봄에는 산사태 위험까지. 계절마다 재난의 종류만 바뀝니다.

저는 캘리포니아의 햇살과 바다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지금도 산타모니카 해변을 걷다 보면 이래서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여기 사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집값은 비싸고, 보험료는 올라가고, 전기요금도 만만치 않은데 이제는 대피 가방까지 준비해 놓고 살아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여기 사는 게 맞는 건가 싶습니다. 오늘도 산타모니카에 앉아 태평양을 바라봅니다.

날씨 하나는 끝내준다고 자랑하던 남가주에서, 이제는 날씨 때문에 집을 버리고 도망갈 준비를 해야 한다니.

참 비싼 돈 내고 살면서 이런 뉴스거리의 주인공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