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열다섯 살이던 그 해, 나는 부모님과 함께 이민 가방을 싸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날아왔다.
그때부터 미국학교에 전학온 나는 말 그대로 “sink or swim” 상태였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읽는 건 그나마 괜찮았는데, 점심시간에 애들이 던지는 일상영어는 정말 힘들었다.
특히나 사람 성격을 표현하는 단어들 중엔 지금도 헷갈리는 게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passive-aggressive".
이 표현을 처음 들은 건 학교친구와 말다툼 비슷한 걸 한 직후였다. 나는 그냥 기분 나쁜 걸 억지로 웃으며 넘겼고, 그때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You know what? You’re being really passive-aggressive right now."
나는 속으로 ‘어? aggressive(공격적)도 아니고, passive(소극적)도 아니고, 둘 다라고?’ 혼란스러웠다. 사전 찾아보니 “수동적(소극적)으로 공격적인 사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돌려서 말하며 불편함을 드러내는 성향” 이런 뜻이었다.
쉽게 말하면 겉으로는 “괜찮아~” 하면서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은 상태. 말로는 “알겠어~ 네가 맞아~” 하면서 그 뒤에 눈을 부릅뜨는 그런 스타일.
사실 이런게 미국 사회에서는 꽤 ‘경계대상’ 되는 성격인데 한국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너무 흔하다.
엄마가 “밥 빨리 먹으러 오라고 하면서” 하면서 주방에서 쿵쾅거리거나, 친구가 “그냥 가, 신경 안 써” 하면서 뭔가 섭섭한 눈빛 보이면, 우린 그걸 자연스럽게 해석해준다.
근데 미국에선?
"passive-aggressive" 인 사람인거다.
미국 문화에선 감정은 “say it straight” (직설적으로 말하라)가 기본 룰이다.
기분이 나쁘면 “That hurt me”라고 말하고, 불만이 있으면 “I think this is unfair”라고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근데 나는 아직도 그게 어렵다.
30대가 된 지금도, 남편이 뭐 하나 실수하면
“괜찮아~” 하면서 문 좀 세게 닫고,
저녁 먹을 때 대화 안 하면서 티 팍팍 내는 내 모습을 보면
‘아직도 나도 passive-aggressive한 면이 있구나’ 싶다.
그 외에 헷갈렸던 사람 표현 영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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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pleaser"
이 말도 은근 한국사람들에게 많이 적용되는 단어다.
겉으론 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감정 억누르고 남만 만족시키는 스타일. -
"control freak"
뭐든 다 자기가 컨트롤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
이건 딱 내 친구 하나가 그랬는데, 여행 갈 때 숙소, 음식, 일정 다 자기가 정하고 내가 뭘 제안하면 “그건 좀…” 하면서 은근히 무시했었다. -
"gaslighter"
이건 요즘 많이 쓰이는데,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의견만이 진실처럼 포장해서 세뇌시키려고 하는 사람.
예를 들면, “너 너무 예민한 거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사람.
미국 살면서 배우는 건 영어보다 ‘표현의 방식’
영어를 배우는 것도 어렵지만, 그 언어에 담긴 감정 표현의 문화를 익히는 건 더 어렵다.
미국 사람들은 “I feel…”로 시작하는 말을 자주 한다.
“I feel hurt.”
“I feel disrespected.”
“I feel like you're ignoring me.”
처음엔 그 말들이 좀 오글거렸지만, 요즘은 이해가 된다. 솔직하게 감정을 말하지 않으면, 결국 “passive-aggressive”가 되고 관계가 꼬이더라고요.
결혼한 지 5년 차. 남편은 미국에서 태어난 2세라서 감정 표현이 아주 투명한 편이다.
어느 날 내가 화가 나 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남편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Are you being passive-aggressive again? Just say it. I can take it.”
그 말 듣고 빵 터졌지만, 솔직히 고마웠다.
passive-aggressive, people pleaser, control freak, gaslighter…
이 모든 단어들은 단순한 영어 표현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프레임이다.
그리고 나는 그 프레임 속에서 나를 계속 재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어색할 때 많지만, 오늘도 나는 “괜찮아” 대신 “I’m not okay with that”라고 말하는 연습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