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에서 살고있는 대학원생 입니다.

이곳 날씨는 뭐 좋은편이고, 바다는 언제나 곁에 있지만, 좀 지루한감이 있긴 하죠.

그러다가, 우리 아파트 세탁실이 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처럼 세탁 바구니를 들고 아파트 세탁실에 갔는데, 문이 닫혀 있더라고요.

처음엔 “뭐야, 세탁기들이 단체로 고장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나중에 관리소에서 들은 말이 걸작이었어요.

“세탁실 전기배선이 도난당했습니다.”

도둑이 그냥 세탁기 통째로 들고 간 것도 아니고, 돈 되는 전기줄들을 뜯어 갔다는 겁니다.

이건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뭔가 예술의 경지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나는 그날부터 샌디에이고 어느 동네에 있는 코인 런더리의 충성고객이 되었습니다.

코인 런더리라니… 처음 그곳에 들어섰을 때 느낀 건, “아, 여긴 ‘캐치 미 이프 유 캔’ 영화다.”

그 유명한 영화에서 톰 행크스의 새하얀 셔츠가 빨래하다가 분홍색으로 변하는 장면 기억하시나요?

그 장면 하나로 ‘아, 저 시절 미국 코인 런더리 문화가 이랬지’ 싶은 기분이 들었는데... 50년도 더 지난 아직도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세탁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저소득층의 현실이 느껴졌어요.

사실 나도 저소득층이긴 한데.....집에 세탁기가 없는 사연들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여기서 보고 있으면.. 묘한 감정이 들어요.

누군가는 낡은 이불을 끌고 오고, 어떤 아줌마는 여러번을 나눠 세탁하면서 책을 읽어요.

어떤 청년은 이어폰을 꽂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요. 뭔가 공통점이 있다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희망을 빨래하는 중’이라는 겁니다.

세탁을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뭔가 정리할 가치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하지만 한편으론, 이곳이 중산층이 오게되는 공간은 절대 아니란 사실도 분명해요.

냉정하게 말해, 여긴 ‘우리 아파트 세탁실이 임시로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이’ 오는 사람과, ‘이게 내 유일한 세탁 옵션’인 사람들이 섞인 장소예요.

그리고 한 블럭만 더 가면, 세탁도 하지 못한 옷을 입은 홈리스들이 벤치에서 낮잠을 자고 있죠.

세탁기 하나로도 계층이 나뉘는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어요.

물론 나는 아직 세탁할 수 있는 계층에 속해 있고, 치킨 샐러드를 먹으며 핸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가끔 세탁 기다리면서 생각해요.

“이거 진짜 내 인생에서 몇 번째 코인 런더리지?”

그렇게 따지면 인생도 동전 넣고 반복하는 세탁기 같지 않나요?

단, 삶은 빨래처럼 표백되지 않아서 문제지만요.

다음 주에는 아파트 세탁실이 정말 수리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때가 오더라도 가끔은 이 코인 런더리에 다시 올 것 같아요.

여기 이불전용 대형 드럼세탁기가 이불빨래를 끝내주게 해준다는 사실을 발견했거든요.

그리고 이곳엔 비누 냄새 보다 삶의 냄새가 나거든요. 가끔은 그게 내겐 위로가 되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