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먹고 맥주 한 잔 하던 자리에서 한 미국인 친구가 이야기를 꺼냈는데, 2차대전을 끝낸 히로시마 원폭에 사망한 미국인 포로들이 12명이나 된다는 거였다.
나도 40살을 넘기도록 한국과 미국의 역사는 많이 읽었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으로 죽은 미군포로 이야기엔 무지했다.
궁금해서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검색을 시작했다가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됐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한다.
폭발 직후 순식간에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고, 그 자리에서 약 7만 명이 즉사했다.
이후 방사능 피폭과 부상으로 인해 몇 달 사이 최종 사망자는 약 14만 명에 이르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애틀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다.
히로시마에는 당시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일본의 전쟁 물자를 생산하던 군수공장, 조선소, 항만, 탄광 등에서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던 이들 중 약 3만5천 명이 원폭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이들은 대부분 조선에서 징용되어 일본 본토로 옮겨진 사람들이었고, 히로시마는 특히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이 집중되어 있던 지역이었다.
더 마음 아픈 사실은, 이들 중 상당수가 전후 일본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이나 위로조차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부는 간신히 살아남아 미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삶을 꾸렸지만, 방사능 피폭 후유증과 정신적 트라우마는 평생 그들을 괴롭혔다. 그들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셈이다.
히로시마에 있던 건 한국인뿐이 아니었다. 미군 포로들도 그 안에 있었다. 내가 찾아본 공식 기록에 따르면, 원폭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 수용 중이던 미국인 포로는 총 12명. 이들은 미 공군 조종사 혹은 해군 장병들이었고,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히로시마 헌병대 시설이나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그리고 그날, 자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에 의해 모두 사망했다.
10명은 폭발 당일 즉사했고, 나머지 2명은 방사능 후유증으로 며칠 혹은 몇 주 뒤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8년 GHQ가 작성한 문서에도 이 내용은 명시되어 있고, 미국 국방부 역시 이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심지어 그들의 가족조차 한동안 이들의 최후를 몰랐다고 한다. 전사로 처리되지 못한 채 '실종'으로만 기록된 경우도 있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일본이라는 적국에 포로로 붙잡혀 있다가, 동료들이 탄 폭격기에서 떨어진 폭탄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이건 그 어떤 영화보다도 비극적인 역사다.
2차대전을 끝내기 위해 80년 전 터진 태양보다 밝았다는 원폭의 섬광. 그 빛은 단순한 기술의 승리라기 보가는 한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지워버린 재앙이기도 했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가하기에 히로시마를 기억한다면, 그 안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인, 미국인, 심지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