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자꾸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었나?”

내가 중고등 학교 다닐때는 TV에서 방영하던 ‘전설의 고향’이 그렇게 무서웠다.

TV에서 처녀귀신이나 시뻘건 눈의 도깨비가 사람을 덮치려 날아오르는 장면에 소리 지르고, 심은하 나왔던 드라마 'M' 인가 뭔가 보고 며칠 동안 제대로 거울도 못 쳐다봤었다. 화장실 갈 땐 문 열어놓고 잘때도 불을 켜놓고 자야 했고.

그 때 긴장감, 그 오싹한 감성과 흥분스러운 느낌이 이상하게 좋았다. 내 나름대로의 스트레스 해소였는지도 모른다.

근데 요즘은 공포영화를 봐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귀신이 불쑥 나와도 “저건 CG고, 음향 효과 넣었네” 싶다.

영화 촬영 현장 분위기며 컴퓨터 그래픽 기술도 눈에 들어오고, 분장한 배우가 보이고, 효과음 넣은 스태프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등장한다. 어느 순간부터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해석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느끼며 생각하게 된다 “이래서 재미가 없구나.”

교회에 나가 기도도 한다. 마음을 다잡고, 평안을 구하고, 감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재미없음’이라는 감정은 기도와도 별개다. 좋아하던 것들이 하나둘 재미없어지는 순간, 가슴이 텅 비는 것 같다. 공포영화가 재미없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뭘 봐도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이 낯설고 무섭다. 이게 다 늙어서 그런 건가 싶다가도, 그냥 마음이 지쳐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몇 달 전 큰아들 부부가 아이를 유산했다. 병원에서 전해 들은 소식은 영화 속 공포보다도 수백 배 더 무서웠다. 그저 조용히 울먹이는 며느리 손을 잡아줬지만, 그날 이후 나도 무너졌다. 기다리던 큰 손주의 빈자리는 곧 가족 전체의 침묵이 되었고, 그 침묵이 이따금씩 나를 덮쳐온다.

이젠 이런게 몸서리쳐지게 무섭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건, 나와 내 가족의 신상 문제다. 건강검진 결과 기다리는 며느리의 표정이, 자꾸 피곤하다는 남편의 말이, 오늘따라 목소리가 작은 친구의 안부 전화가 무섭다.

예전엔 “좀 쉬면 낫겠지”였는데, 이젠 “혹시 큰 병이면 어쩌지?”로 바뀌었다.

살다 보니 진짜 공포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알았다. 그 어떤 괴물보다도 무서운 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라지는 거다.

내가 늙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감성이 메말라가서 그런 걸까?

철부지였던 내가 나이 들수록 감정의 깊이는 깊어지지만, 반대로 감정의 기복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그렇게 평온해진 대신, 뭔가 덜 재미있고, 덜 웃기고, 덜 감동적이다. 대신 더 조심스럽고, 더 무서워진다.

오늘도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주님, 제 마음이 너무 무뎌지지 않게 해주세요.”

나이를 먹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감동할 수 있는 마음, 때로는 오싹하고 깜짝 놀랄 수 있는 감정은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소망.

그래도 아직은, 무섭진 않더라도, 옛날 공포영화 한 편 보고 그때 생각나서 피식 웃을 수 있는것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