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자스에서 살다가 네브라스카로 이사 온 한국인 40대 남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도 처음엔 네브라스카를 얕봤다. 솔직히 말해서 지도에서 보면 캔자스 옆에 붙어 있는 비슷한 평원, 옥수수밭 말고는 별거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Kansas에서 몇 년을 살다 보니 끝없는 들판과 곧은 도로에 이미 익숙해졌고, 그보다 더 단조로울 수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Nebraska로 넘어와 살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다.

이사 오고 가장 먼저 느낀 건 속도의 차이였다. 캔자스도 느린 동네지만, 네브라스카는 한 박자 더 늦다. 처음엔 답답했다. DMV에서 서류 하나 처리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수리공을 부르면 "다음 주쯤"이 기본 멘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달 지나니 그 리듬에 내가 맞춰져 있었다. 급할 이유가 없다는 분위기 자체가 사람을 누그러뜨린다.

두 번째로 놀란 건 사람들이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는데,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깊다. 옆집 아저씨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자기 할아버지가 1950년대에 군 복무를 했다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인데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한다. 캔자스에서도 친절함은 느꼈지만, 네브라스카 쪽은 그게 계산이 아니라 습관처럼 느껴졌다.

옥수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풍경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 똑같아 보이던 들판이 계절마다 표정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여름엔 초록이 너무 진해서 눈이 아프고, 가을엔 수확 직전의 밭이 묘하게 긴장감을 준다. 겨울엔 바람이 미친 듯이 불지만, 그 바람 덕분에 하늘이 믿기 힘들 만큼 맑아진다. 캔자스에서도 하늘은 컸지만, 네브라스카 하늘은 더 비어 있고 더 솔직하다.

생활 면에서도 예상 밖의 일들이 있었다. 작은 동네라 선택지는 적은데, 대신 실패 확률도 낮다. 식당 하나 새로 생기면 동네 사람들이 다 가본다. 내가 자주 가는 식당 사장은 어느 날 갑자기 "요즘 얼굴이 안 보이네"라고 말한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존재가 통계가 아니라 사람으로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40대가 되니까 이런 환경이 더 와 닿는다. 젊을 때는 자극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유지가 더 중요하다. 네브라스카는 뭔가를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대신 잃을 가능성도 적다. 캔자스에서 이미 한 번 내려놓는 연습을 했던 터라, 네브라스카에서는 그 내려놓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결국 네브라스카에서 벌어진 일들이란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갑자기 인생이 바뀌거나, 성공 스토리가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다. 대신 생각이 정리되고, 속도가 늦춰지고, 내가 어디까지 필요한 사람인지가 또렷해진다. 옥수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이곳에서, 의외로 가장 많이 마주한 건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사 잘 왔다는 생각을 한다. 조용하지만 허전하지 않은 동네, 네브라스카는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