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5시면 캄캄한 미국 겨울, 윈터 블루스 이기는 법 - Gaithersburg - 1

퇴근길에 차 시동을 걸었는데 하늘이 벌써 시커먼 날이 있습니다. 시계를 보면 아직 다섯 시도 안 됐어요. 미국 와서 몇 해를 보냈어도 이 순간만큼은 적응이 잘 안 됩니다.

올해 서머타임은 11월 1일 일요일 새벽 2시에 끝납니다.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리는 그날부터 저녁이 한꺼번에 당겨지는 거죠.

해군천문대(USNO) 자료를 보면 DC 일대의 일몰이 가장 이른 시기는 12월 초부터 11일 무렵까지입니다. 이때 해가 오후 4시 46분쯤 집니다.

재미있는 건 동지가 아니라 그보다 2주쯤 앞서 일몰이 가장 이르다는 점입니다. 시계 시간과 태양의 실제 움직임이 딱 맞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하네요. 올해 동지는 12월 21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맘때 미국 직장에서는 "winter blues"라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처음엔 그냥 날씨 핑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의학적으로는 구분이 있습니다. 가벼운 우울감은 winter blues라고 부르고,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반복되면 계절성 정동장애, 흔히 SAD라고 부릅니다.

SAD의 겨울형 증상으로는 피로감, 과다 수면, 탄수화물 당김, 사람을 피하는 경향 같은 것들이 꼽힙니다.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도 포함되고요.

제가 흥미롭게 본 건 미국 사람들의 대응 방식입니다. 한국식으로 "그냥 버티자"가 아니라, 꽤 체계적으로 대책을 세웁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게 라이트 박스입니다. 동료 책상 위에 태블릿만 한 하얀 조명이 놓여 있길래 물어봤더니, 아침마다 이걸 켜고 이메일을 본다더군요.

메이요 클리닉 안내를 보면 기준은 10,000룩스입니다. 자외선은 최대한 걸러지는 제품이어야 하고요.

사용법도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일어나서 한 시간 안에 20~30분 정도, 팔 길이쯤 떨어진 곳에 켜두면 됩니다. 불빛을 똑바로 쳐다볼 필요는 없고 커피를 마시거나 노트북 작업을 해도 된다고 합니다.

다만 알아둘 점이 있습니다. 라이트 박스는 SAD 치료용으로 FDA 승인을 받은 기기가 아니고, 대부분의 보험도 비용을 커버하지 않습니다.

양극성 장애가 있거나 녹내장, 백내장 같은 눈 질환이 있는 분은 먼저 전문의 조언을 받으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증상이 오래가거나 심하다면 혼자 판단하지 말고 꼭 의사와 상의하시길 바랍니다.

재미있는 건 이게 특별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무실 몇 군데만 둘러봐도 비슷한 조명이 하나둘 보입니다.

두 번째로 보이는 건 점심시간 산책입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으니 그 시간을 일부러 챙기는 겁니다.

회사 주차장을 한 바퀴 도는 사람, 카페까지 일부러 걸어가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여름엔 안 보이던 풍경이에요.

세 번째는 조명 문화입니다. 핼러윈이 끝나기 무섭게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전구가 올라가는 걸 보면 처음엔 좀 성급하다 싶었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다섯 시면 캄캄한 동네에서 처마 끝 전구 몇 줄이 주는 위안이 생각보다 크거든요.

네 번째는 사람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퇴근 후 happy hour, 교회 소그룹, 동네 볼링 리그처럼 정해진 모임을 겨울에 더 열심히 챙기더군요.

혼자 고립되는 게 겨울 우울감의 대표 증상이다 보니, 일정으로 묶어두는 게 나름 합리적인 전략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시계를 안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실제로 올해 7월 14일 연방 하원이 Sunshine Protection Act를 308 대 117로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상원 문턱은 아직 못 넘었습니다. 겨울 아침에 아이들이 어두운 길을 등교해야 한다는 안전 우려가 반대 논리의 핵심이고요. 그러니 올해도 11월 1일에 시계는 그대로 돌아갑니다.

양쪽 논리가 다 일리가 있습니다. 저녁 햇빛을 원하는 쪽도, 아침 안전을 걱정하는 쪽도 데이터와 경험을 들고 있으니까요.

제 일이 집을 보는 일이라 그런지, 이 문제를 볼 때 자꾸 집 구조가 떠오릅니다. 겨울에 집을 보러 오는 바이어들이 남향 창이나 큰 거실 창을 유독 꼼꼼히 확인하거든요.

여름엔 차고 크기를 묻던 사람들이 겨울엔 빛이 몇 시까지 들어오느냐를 묻습니다. 계절이 사람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겁니다.

반대로 해가 일찍 드는 동향 부엌을 겨울 장점으로 꼽는 분도 있습니다. 아침 햇빛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는 게 라이트 박스보다 낫다는 거죠.

결국 미국 사람들이 겨울을 버티는 방식은 하나로 요약됩니다. 줄어든 빛을 의도적으로 채우고, 끊기기 쉬운 관계를 일정으로 붙잡는 겁니다.

저는 이 방식이 꽤 마음에 듭니다. 기분 문제를 의지력으로만 해결하려 하지 않고, 환경과 루틴을 바꾸는 쪽으로 접근하니까요.

저라면 올겨울엔 점심 산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돈도 안 들고, 효과를 따져보기도 쉽습니다.

11월 첫 주, 시계를 돌리는 날 작은 계획 하나 세워보시죠. 다섯 시의 어둠은 바꿀 수 없어도, 그 어둠을 맞는 방식은 우리가 고를 수 있습니다.